
천천히 달리는 연습 『천 개의 파랑』 - 천선란
『천 개의 파랑』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을 통해 ‘느림’과 ‘공존’, 그리고 ‘배려’를 이야기하는 감성 SF 소설이다. 빠르게 흘러가는 삶 속에서 잠시 멈춰 서게 만드는 이야기다.
천선란 작가. 이전에 좋아하는 배우 박정민의 인터뷰에서 언뜻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평소 SF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그의 추천 도서들은 대체로 만족스러웠기에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선택하게 됐다.
최근 크고 작은 일들이 연달아 이어지며 마음이 다소 혼란스러웠다. 그 와중에 『천 개의 파랑』은 잠시 머물 수 있는 조용한 피난처 같은 책이었다.
책 정보
- 제목 : 천 개의 파랑
- 지은이 : 천선란
- 장르 : 소설 (SF)
- 출판사 : 허블
- 페이지 : 374쪽
휴머노이드 로봇 콜리, 그리고 ‘선택’이라는 감정
“인간이 재미있는데 왜 말이 달리나요? 그럼 인간이 달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P.23)
『천 개의 파랑』은 휴머노이드 로봇 ‘콜리’와 소녀 ‘우연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콜리는 경주마 기수 역할을 하던 로봇이었지만, 스스로 ‘낙마’를 선택하면서 더 이상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 이후 헐값에 연재에게 팔리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로봇이 ‘선택’을 한다는 설정은 소설적 장치처럼 보이지만, 2020년에 발표된 작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지금의 인공지능 발전 속도와 크게 동떨어진 이야기만은 아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콜리가 경주마 ‘투데이’를 위해 자신의 파손을 감수하면서까지 두 번이나 낙마를 선택하는 장면이다.
이 순간, 콜리는 단순한 기계가 아닌 ‘타인을 배려하는 존재’로 느껴졌고,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기술이 발전해도 사라지지 않는 격차
기술의 발전은 모두를 더 나은 삶으로 이끌 것이라는 기대를 만든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낙관적인 전망에 조용히 질문을 던진다.
연재의 언니 은혜는 소아마비로 인해 이동이 불편하지만, 로봇 다리 수술을 받으면 충분히 일상을 회복할 수 있다. 문제는 ‘비보험’이라는 현실적인 장벽이다.
세상이 조금만 더 자신을 남들처럼만 대해준다면 은혜는 사이보그 따위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몇천만 원을 웃도는 기계 다리 부착 수술보다 더 필요했던 건 인도에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로와 가게로 들어갈 수 있는 리프트, 횡단보도의 여유로운 보행자 신호, 버스와 지하철을 누구의 도움 없이도 탈 수 있는 안전함이었다. (P.97)
이 문장은 단순한 경제적 문제를 넘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기본적인 배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연재가 자신의 환경을 ‘균열’이라고 표현하는 장면은 담담하지만 깊은 울림을 준다.
새로운 것이 나오면 옛것은 빨리빨리 모습을 감춰야 된다는 듯이, 아직까지 탈바꿈하지 못한 연재의 삶을 희한하고 불편한 것으로 치부했다. 정작 살아가는 연재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음에도. (P.196)
빠른 세상 속에서 발견한 ‘느림의 가치’
“너무 빠르니까요. 조금 느려도 되지 않을까요?” (P.164)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남는 문장이다.
우리는 효율과 속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오히려 ‘느림’ 속에서 더 중요한 감정을 발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로봇 콜리는, 느린 순간 속에서 ‘행복’을 인식한다. 그리고 그 감정은 ‘떨림’이라는 형태로 전달된다.
당신이 내 이야기를 어떻게 보았는지, 내 짤막한 ‘삶’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당신도 떨림을 느꼈을까? 호흡 할 수 없는 내가 호흡하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처럼, 나를 통해 당신도 떨림을 느꼈을까? (P.350)
이 문장을 읽으며 오히려 내가 더 무감각한 존재로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무리|천 개의 파랑,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
우리는 늘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일조차 잊고 지낸다.
『천 개의 파랑』은 그런 일상을 잠시 멈추게 만든다.
읽고 나니 다양한 감정이 떠올랐지만, 막상 그것을 명확하게 표현하기는 쉽지 않았다. 복잡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순수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날씨 좋은 날, 잠시 속도를 늦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하루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천 개의 파랑이 펼쳐진 하늘 아래에서, 천천히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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