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헬로우 고스트>의 감독으로 알려진 김영탁 작가의 장편소설 곰탕을 인상 깊게 읽은 기억이 있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허구의 이야기지만, 지나치게 과장된 가상 세계 설정에는 유독 거부감을 느끼는 편이다. 그런데 김영탁 작가의 『곰탕』은 그런 불편함이 거의 없었다. 현실과 상상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 읽은 영수와 0수도 비슷한 결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책 표지만 봐도 가상 세계 설정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작품이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번 작품 역시 가상 세계를 설득력 있게 활용한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책 정보
제목 : 영수와 0수
저자 : 김영탁
장르 : 소설
출판사 : 멍투탁
총 페이지 : 339페이지
간단한 줄거리
통제되지 않는 바이러스가 창궐한 세계. 인간은 모두 방호복을 입고 살아간다. 끝없는 격리 생활 속에서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많아지고, 자살률 또한 급격히 증가한다.
결국 정부는 극단적인 정책을 도입한다.
‘자살 연좌죄’다.
누군가 자살하면 그 친족의 근무일이 하루씩 늘어난다. 기본이 주 5일 근무지만, 친족이 자살할 경우 주 6일, 심하면 주 7일 근무까지 이어진다.
이 제도 때문에 주인공 영수는 자살 충동을 느끼면서도 실행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영수는 충격적인 제안을 받는다.
복제 인간을 구매해 자신의 삶을 대신 살게 한 뒤, 마음 편히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영수의 복제 인간 ‘0수’.
하지만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생한다.
영수의 모든 것이 그대로 복제된 0수 역시 자살 충동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0수가 살아야 영수가 죽을 수 있다.
그래서 영수는 아이러니하게도 0수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수의 마음에도 변화가 생긴다.
기억 – 모두 지워버리면 행복해질까
여기 쏟아버리고 비워져 버린 머릿속은 뭐가 채우고 있을까?
그 상실의 공허를 돈이 메꿀 수 있을까? (P.71)
이 소설에서는 기억을 사고파는 것이 가능한 세계가 등장한다.
기억은 영상처럼 편집할 수도 있다. 그래서 영수는 퇴근할 때 특별한 기계를 이용해 업무 중에 생긴 기억을 모두 지우고 집으로 돌아간다.
처음 이 설정을 접했을 때는 솔직히 부러웠다.
살면서 불필요한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훨씬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작품 속 인물들에게는 모든 기억이 소중한 삶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기억은 과거와 현재의 나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다. 심지어 좋지 않은 기억조차 지금의 나를 만든 중요한 조각이 된다.
그게 내 기억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나는 그 기억 속에서 살았고, 나는 그 기억으로만 살아서, 그렇게 보낸 시간이, 그 세월이 내 삶이에요. 다른 삶은, 기억이 안 나요. (P.284)
사람들은 흔히 현재에 집중하고 미래를 준비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영수에게는 오히려 과거가 더 위로가 된다.
사람들은 자꾸 오늘을 살고 미래를 준비하라지만 영수는 과거에 머무르는 게 좋았다. 현재를 위로하기에 과거만큼 좋은 게 어디 있을까? 영수는 과거의 기억들이 적금 같았다. 힘들 때 언제든 빼서 쓸 수 있는, 틈틈이 소중히 모은 적금. (P.321)
이 표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기억을 ‘적금’에 비유한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나를 구원하는 나 – 영수를 살린 0수
0수는 영수가 수시로 걱정이 되었다. 영수가 뭘 해도 0수는 영수가 걱정이 되었다.
0수는 자신 때문에 원치 않게 세상에 내보내진 영수가 언제나 안쓰러웠다. (P.154)
자신의 욕망까지 그대로 복제된 존재인 0수를 통해 영수는 자신의 삶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0수와의 관계 속에서 과거에 팔아버렸던 기억들,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던 삶에 대한 욕망을 다시 발견한다.
0수가 영수를 살리기 위해 행동하는 모습은 결국 영수가 스스로를 구원하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를 살린 나’라는 기억은 앞으로 영수가 살아가는 삶에서 큰 의미로 남지 않을까. 그리고 영수 못지않게 0수 역시 살아가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무리
김영탁 작가의 전작 『곰탕』과 마찬가지로 『영수와 0수』 역시 시나리오를 읽는 것처럼 술술 읽히는 소설이었다. 글을 읽다 보면 장면이 자연스럽게 눈앞에 그려지는 순간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읽는 동안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 장면은 영화로 만들면 어떻게 표현될까?”
특히 작품의 배경이 바이러스와 인공지능이라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이미 경험했고, 앞으로도 계속 마주하게 될 현실적인 소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읽고 나면 항상 ‘작가의 말’을 챙겨 읽는 편이다. 작품에 대한 내 해석과 작가의 의도를 비교해 보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작가의 마지막 문장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죽음을 생각하는 게 좋은 습관이라고는 할 수 없지요. 권하는 건 더욱이 아닙니다. 다만 죽음을 건강하게 떠올린다는 건, 어쩌면 삶이랑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너무 가까이 두지는 말자구요. 어차피 그 한가운데 있으니까요. - 작가의 말
삶과 죽음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었다.
시간여행으로 끓여낸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김영탁 『곰탕: 미래에서 온 살인자』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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