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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주절 한스푼 - 책/인문*에세이

판결문 뒤에 숨은 인간의 얼굴 – 박주영 판사의 『어떤 양형 이유』 리뷰

by joojul1spoon 2025. 11. 6.

출처 : 밀리의 서재

 

판사의 시선으로 바라본 법, 정의, 그리고 인간의 이야기

많은 매체에서 추천 도서로 소개된 박주영 판사의 『어떤 양형 이유』를 밀리의 서재에서 발견했다.

살면서 법정을 드나들 일은 흔치 않기에, ‘판사’라는 직업의 내면을 엿볼 기회는 거의 없다. 이 책은 그런 거리감을 좁혀주는, 법정 안쪽의 인간적인 시선을 담은 에세이다.


 

책 정보

  • 제목: 어떤 양형 이유
  • 저자: 박주영
  • 출판사: 모로
  • 장르: 법정 에세이 / 논픽션
  • 페이지: 279쪽

판결문에서 배제된 ‘감상’을 들여다보다

판결문은 오로지 ‘사실’을 기록한다. 판사 개인의 감상은 철저히 배제된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유일하게 인간적인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양형 이유’다.

‘어떤 양형 이유’는 판사가 어떤 기준으로 판결을 내리고 형량을 정하는지에 대한 근거와 함께, 법정에서 마주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책 속 한 구절이 특히 인상 깊었다.

 

법정은 모든 아름다운 구축물을 해체하는 곳이다. 사랑은 맨 먼저 해체되고, 결국 가정도 해체된다. 형사사건에서는 한 인간의 자유를 지지해 준 법적 근거마저 해체시킨다. 재산을 나누고, 아이도 나눈다. 사랑의 잔해를 뒤적이고 수습하다 보면 법정이 도축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법관은 굳어버린 사랑을 발라낸 다음 가정을 이분도체, 사분도체로 잘라내고 무두질한다. 법은 날카롭게 벼린 칼이고, 법관은 발골사다. (P.26)

 

이 문장은 법정이라는 공간이 가진 냉정함과, 그 안에서 일하는 법관의 현실적 감정을 동시에 전한다.


판결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관심’과 ‘제도 변화’

저자는 소년범, 마약·알코올 중독자, 정신질환자 등 다양한 피고인을 다루며 유무죄를 넘어선 사회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는 이들을 ‘미래를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라 표현하며, 단순히 처벌로는 재범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한다.

“재판장에서 다시 만날 가능성이 높다. 분쟁의 사후적 해결보다, 문제 해결을 통한 분쟁 예방이 필요하다.”

특히 재범자를 계속 맞이하게 되는 현실을 꼬집으며, 판사 자신을 ‘회전문 집사’라 표현한 부분은 씁쓸하면서도 아이러니하다.


법정의 정의는 과연 100%일까?

약식재판의 피고인 대부분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서민들이다.

그들의 벌금을 감경해 주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일일까, 불의일까?

저자는 이런 질문 속에서 판사로서의 갈등과 한계를 진솔하게 드러낸다.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 취급한다는 정의론은 사실상 알맹이 없는 이론이다. 세상에 같은 사례는 없다. 서로 유사한 것을 같은 범주로 묶어 같다고 선언할 수밖에 없는데, 일반화하고 범주화하는 과정에서 벌써 정의는 훼손되고 만다. 다른 것을 같은 것으로 취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황은 얼마든지 변주되고 무한히 확장된다. 이런 논리적 모순과 간극을 메우기 위해 규범과 해석은 열려 있어야 한다. 반증 가능성 없는 명제가 참이 아니듯 닫힌 규범과 해석은 위험하고, 정의에 반할 가능성이 높다. 법정형을 무겁게 하고 판사의 재량을 줄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P.247)

 

또한 정의를 ‘제로섬 게임’이 아닌 ‘윈윈 게임’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저자의 시선은, 법을 인간의 관점으로 되돌리는 통찰을 보여준다.

“당신의 천국이 나의 지옥이 되는 곳은 정의가 무너진 곳이다… 정의는 치킨게임이 아니라 윈윈게임이다.” (p.151)

 


마무리 – 법을 통해 인간을 이야기하다

이 책은 차가운 법의 언어 속에서 여전히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이해를 잃지 않으려는 한 판사의 고백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SF소설의 어두운 전망이 현실로 엄습하는 시대에, 형사법정에 앉아 매주 인간성을 회의하며 살아가는 내가 두려운 것은, 인간이 AI와 기계로 대체되거나 이것들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두려운 건 인간성이나 인간에 내재된 선함과 신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P.62)

 

법과 인간, 정의와 현실의 경계에서 고민하는 이 책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