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가시노 게이고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으로 대중에게 따뜻한 이미지를 각인시킨 작가다. 하지만 내가 처음 그의 진가를 느낀 작품은 바로 《방황하는 칼날》이었다. 예측 불가능하게 전개되는 이야기, 날카로운 사회적 문제의식, 그리고 독자를 압도하는 서스펜스. 이 책을 읽은 이후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이름을 들으면 ‘탄탄한 추리와 압도적 몰입감’을 먼저 떠올리게 됐다. 오랜만에 그 감정을 다시 느껴보고 싶어 선택한 작품이 바로 그의 신작 《가공범》이다.
책 정보
- 제목: 가공범
- 저자: 히가시노 게이고
- 출판사: 북다
- 장르: 추리/미스터리 소설
- 분량: 종이책 기준 528쪽
- 초판 출간일: 2025년 7월 21일
- 예상 완독 시간: 약 5시간
줄거리 요약
이야기는 일본 사회를 뒤흔든 한 살인사건에서 시작된다. 유명 정치인 도도 야스유키와 그의 아내 도도 에리코가 주택 화재 현장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것. 처음에는 단순한 화재사고로 보였지만, 감식 결과 두 사람의 사인이 교살임이 밝혀진다.
수사를 맡게 된 형사 고다이 쓰토무와 그의 파트너 야마오 요스케는 사건의 배후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야마오의 수상한 태도와 미묘한 눈빛은 고다이에게 의심을 심어준다.
조사가 진행될수록 도도 부부의 화려한 겉모습 이면에 감춰진 과거가 드러난다. 특히 배우 출신이었던 도도 에리코의 행적이 사건의 열쇠가 된다. 수많은 단서와 인물들이 얽히고설키며 독자는 마치 경찰 수사 현장을 직접 체험하는 듯한 몰입을 느끼게 된다.
제목 ‘가공범’의 의미
추리소설에서 제목은 종종 독자에게 중요한 힌트가 된다. 하지만 《가공범》은 중반부까지도 제목의 의미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는 수사물인데 왜 ‘가공범’일까?
그 의문은 수사 과정 중 쓰쓰이의 발언에서 실마리가 풀린다.
“그래,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아다니는 모양새라 허탈하다는 뜻으로 말이지.”
그렇게 말하고 쓰쓰이는 사쿠라카와 쪽을 힐끔 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군. 우리는 가공의 범인에게 휘둘리고 있는 게 아닐까?” (P.328)
손에 잡힐 듯 계속 흔적을 남기지만 명확한 증거는 보이지 않는 범인. 유령 같은 존재에 쫓기는 형사들의 심리를 잘 드러낸 대목이다. 이 순간 독자는 제목의 의미를 이해하고, 한층 더 사건의 진실을 좇게 된다. ‘가공범’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범죄 추적 이상의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식 수사의 매력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의 매력은 바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사 전개”다. 《가공범》 역시 마찬가지다.
작품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슴슴하지만 깊은 맛이 있는 국물’ 같은 느낌을 받는다. 톡 쏘는 자극은 없지만, 어느새 책장을 덮을 때까지 한 호흡에 달려가게 만드는 힘. 이건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흡입력이다.
주인공 고다이 쓰토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슈퍼 히어로 같은 형사가 아니다. 오히려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집요함과 진중한 태도 덕분에 독자는 사건의 전개에 자연스럽게 동화된다. 일본을 배경으로 하지만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익숙한 현실 드라마처럼 읽히는 점도 몰입을 높여준다.
총평: 매끄럽지만 아쉬운 결말
결말에 이르기까지 《가공범》은 조여 오는 긴장감과 치밀한 퍼즐 맞추기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막상 마무리는 다소 힘이 빠지는 느낌을 준다. 거대한 음모나 충격적인 반전을 기대했던 탓일까. 범행 동기와 결말은 생각보다 전형적이었고, 살짝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과정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문체와 촘촘한 수사 과정 덕분에 ‘몰입’이라는 키워드는 끝까지 유지된다. 추리소설 팬이라면, 혹은 《방황하는 칼날》 같은 수사물의 긴장감을 좋아했던 독자라면 분명 만족스러운 독서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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