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리의 서재에 올라온 따끈한 신작처럼 보였지만, 사실 이 작품은 17년 전에 이미 연재가 끝난 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리뷰 평점이 높은 작품. 그래서 더욱 궁금해졌다. 과연 어떤 이야기이길래 이렇게 오래 사랑받고 있을까.
책 정보
- 제목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저자 : 박민규
- 장르 : 국내소설
- 출판사 : 위즈덤하우스
- 분량 : 448페이지
혼란스러웠던 열아홉의 ‘그’와 ‘그녀’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는 이름이 없다. 남자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며, 이야기는 ‘그’가 열아홉 살이던 1985년에서 시작된다.
항상 현실을 책임지던 어머니, 그리고 ‘그’를 떠나 재혼해 버린 아버지. 그로 인해 ‘그’의 열아홉은 혼란 그 자체다.
인생은 늘 막연하면서도 확연한 안개와 같은 것이었다. (P.59)
후덥지근하면서도 축축하고… 반팔을 입으면 서늘한데 긴팔을 입으면 땀이 차는… 그래서 여름도 가을도 아닌 이상한 계절을 맞이한 기분이었다. 모쪼록 내 마음도 그런 계절을 닮아 있었다. 화가 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화를 풀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우울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결코 기쁘다고도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P.77)
무엇에라도 정신이 팔려야겠다는 심정으로 시작한 백화점 아르바이트에서 ‘그’는 ‘그녀’를 만나게 된다.
못생긴 걸로 유명하다는 ‘그녀’.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신경이 쓰인다. 갈팡질팡하는 ‘그’의 마음을, 같은 아르바이트생인 요한이 정확하게 짚어낸다.
그 친구를… 좋아하고 싶은 거니, 아니면 좋아해 주고 싶은 거니? (P.134)
무엇보다 뜨거웠던 스무 살의 사랑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지만, 결국 ‘그녀’는 ‘그’를 떠난다.
그녀가 남긴 장문의 이별 편지는 읽는 내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될 만큼.
외모 콤플렉스로 스스로를 마취하며 살아온 ‘그녀’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는 고통 앞에서는 어떤 마취도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은 그녀를 변화시켰고, 점점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달의 한 면만 보는 것처럼, 그녀 역시 ‘그’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사랑합니다.
한 번도 못한 말이고 다시는 못할 말이지만… 부디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차곡차곡 이 말을 눌러쓰면서 알았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만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도 있는 거라고… 저 역시 스스로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계시기 바랍니다. (P.296)
‘그녀’ 없이 현실을 살아가지만, ‘그’ 역시 그녀를 잊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만나도, 결국 마음은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온다.
잘 지내고 있어
그런 순간이면 말없이,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도 잘 지내고 있어요, 나도 잘 지내고 있어... 마음의 협곡을 돌고 돌아, 또 어김없이 돌아오던 내면의 메아리를 잊을 수 없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그녀는 또 어디에 있을까... 어디로 가는 건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거대한 쥐 떼처럼 흘러가는 밤의, 검은 강물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었다. 그런 순간만큼은, 어떤 피리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이었다. (P.319)
인생을 달관한 명언 제조기, ‘요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그’와 ‘그녀’의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 둘을 잇는 요한이라는 인물의 존재감이 상당하다.
특히 연애 상담이나 인생 고민 앞에서 요한이 던지는 말들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든다.
인간은 대부분 자기(自己)와, 자신(自身)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익과 건강이 최고인 거야. 하지만 좀처럼 자아(自我)는 가지려 들지 않아. 그렇게 견고한 자기, 자신을 가지고서도 늘 남과 비교를 하는 이유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끝없이 가지려 드는 거야. 끝없이 오래 살려하고... 그래서 끝끝내 행복할 수 없는 거지. (P.160)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의 불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무시하는 거야. 불을 밝혔을 때의 서로를... 또 서로를 밝히는 것이 서로서로임을 모르기 때문이지. (P.190)
이 세상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인간들로 끓어넘치는 곳인지를 말이야. 종교가 다르다고 서로를 죽이는 게 인간이야. 인종이 다르다고, 이념이 다르다고 수천수만 명을 죽일 수 있는 게 인간이야. 만 원짜리 한 장을 뺏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게 인간이고, 아들을 낳지 못했다고 여자를 죽이는 게 인간이야. 쥐꼬리만 한 권력에도 끝없이 굽신거리는 게 인간이고, 말도 안 되는 관념 하나로 평생을 사는 게 인간이야. (P.224)
마무리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1980년대 연애 이야기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2025년을 사는 지금 더 깊이 와닿는 소설이라고 느꼈다.
휴대폰도, 이메일도 없던 시절. 연락이 닿지 않는 시간이 당연했던 시대의 사랑은 지금보다 훨씬 느리고, 애틋하고, 낭만적이었다.
연말에 마음이 차분해지고 풍성해지는, 제대로 된 연애소설 한 권을 만난 기분이다.
천천히 읽고, 오래 여운이 남는 소설을 찾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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